.

SOONGSIL MEDIA

숭실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며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고난주간 묵상설교문 - 토요일(십자가와 부활사이 - 마27:62-66)

작성자
숭실교회
작성일
2020-04-11 10:16
조회
5159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무덤에 머물러 계신 토요일입니다. 보내드린 2020년도 고난주간 묵상집은 마가복음의 기록에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도록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토요일의 기록,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하루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록이 없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묵상을 통해 마가복음이 침묵하고 있는 토요일에 있었던 세 가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앞장 선 사람들에게 토요일은 불안의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까봐 불안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부활의 진리를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후에 부활하셨다고 할 수 있으니, 군사를 보내어 사흘 내내 무덤을 견고하게 지켜달라고 부탁합니다. 빌라도는 이들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이렇게 로마의 군사들이 무덤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의 문은 열렸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로마의 병사들은 이 빈 무덤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 백성의 지도자들이 로마의 병사들에게 돈을 주면서, 자신들이 계획한대로 부활의 진리를 은폐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운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마28:12-13)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납니다. 이들은 그토록 부활의 진리를 감추려고 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시므로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유사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수많은 세상의 사람들이 부활은 있을 수 없다, 부활은 사실이 아니고 거짓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이름과 교회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부활의 진리를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수많은 성경의 증인들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의 부활을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재림의 그날에 이 부활의 사실과 진리는 만천하에 그대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른 사람들은 이 토요일에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과 죽음까지도 함께 하겠다고 맹세하였지만 막상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던 제자들, 그리고 베드로처럼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제자들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랐던 사람들, 특히 여성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마가복음 16장 10절에 보면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께서 수차례나 예고해주신 일,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의 증언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는 말씀이 계속해서 기록되고 있습니다(막16:11, 13, 14). 결국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한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고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자신의 부활, 그리고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실 때, 그러니까 죽음의 권세 아래에 계실 때 성부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상상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제 생각에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 당하시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보시고 가슴을 찢으며 아파하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의 고통을 보시고 그것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지만, 인생들을 위하여 그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성부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과 전쟁을 벌이십니다. 그 죽음의 권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기 위한 전쟁입니다. 우리는 이 전쟁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단은 끝까지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붙잡아두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예수님을 죽음에서 건지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것과 죽음은 생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저와 여러분을 위한 약속입니다. 사단은 결코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삼을 수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마지막은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소망으로 힘겨운 오늘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 부활의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 코로나 19로 신음하는 세상에 부활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전체 3

  • 2020-04-11 10:58
    저 따위가 뭐라고...
    그 끔찍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견디신 주님의 사랑에 무한 감사드립니다.

  • 2020-04-11 12:58
    할렐루야 ~
    집사님은 주님께서 목숨을 내어주실만큼
    소중하고 사랑 받아 마땅하신 분입니다~
    우리 누구나 주님께는 그런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 2021-03-31 19:06
    https://bigbluebook.org/ko/187/2/
    십자가형
    2. 십자가형
    187:2.1

    군인들은 먼저 주(主)의 팔을 가로 들보에 끈으로 묶었으며, 그 후에 그의 손을 나무에 못박았다. 그들은 이 가로 들보를 기둥 위로 끌어올리고, 똑바로 세워진 십자가 나무에 견고히 못을 박은 후에, 그의 발도 나무에 묶고, 두 발을 관통하도록 한 개의 긴 못을 사용하여, 그의 발을 나무에 못박았다. 똑바로 세워진 나무에는 큰 쐐기 못이 적당한 높이에 박혀 있어서 몸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발판 역할을 하였다. 그 십자가는 높지 않았으므로, 주(主)의 발끝에서 땅까지는 약 3피트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를 비웃는 모든 말들을 들으실 수 있었으며, 생각 없이 자기를 조롱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확실하게 보실 수 있었다. 또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시간을 끄는 고통과 이 시간들 동안 서서히 죽어 가는 예수가 말하는 것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187:2.2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들로부터 옷을 모두 벗기는 것이 관례였지만, 유대인들은 벗겨진 육체가 대중들 앞에 노출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당히 허리 부분만 감추는 옷을 입혔다. 따라서 예수의 옷이 벗겨진 후, 그가 십자기에 달려지기 전에 그는 그런 옷이 입혀졌다.
    187:2.3

    십자가형은 오래 지속되는 잔인한 형벌로 자주 이용되었으며, 사형수가 며칠 동안 죽지 않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예루살렘에서는 십자가형을 상당히 반대하는 정서가 있었으며, 사형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 형장에 늘 대리인을 보내는 유대인 부인회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목이 마르셨을 때 마취제가 섞인 이 포도주를 맛보시고, 마시기를 거절하였다. 주(主)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의식(意識)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러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형태 속에서도 죽음에 대처하고, 충만한 인간 체험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심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187:2.4

    예수가 십자가에 박히시기 전에, 두 강도들은 이미 각자의 십자가에 달렸으며, 그 동안 내내 형 집행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침을 뱉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 가로대에 못 박을 때, 그는 오직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는 저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이었을 뿐이다. 그처럼 애정 어린 헌신에서의 생각들이, 사심-없이 봉사하는 모든 그의 일생의 주요한 동기가 아니었다면, 그가 자신의 형을 집행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토록 자비롭고 그리고 사랑으로 중재하는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평생 동안의 관념, 동기, 갈망은 위기에 처했을 때 훤히 계시된다.
    187:2.5

    주(主)가 십자가 위로 끌어올려진 후에, 그 지휘관은 그의 머리 위쪽에 명패를 못박았으며, 세 나라 말로 “나사렛 예수─유대인의 왕”이라 적혀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것이 자기들을 모욕하는 것이라 믿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 분노 하였다; 그는 그가 협박을 당했고 창피를 당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 작은 복수의 방법을 취했다. 그는 “예수, 반역자”라고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나사렛이라는 바로 그 이름을 얼마나 싫어하는 지를 잘 알았으므로,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하려고 작정하였다. 사형 당한 이 갈릴리인이 “유대인의 왕”이라 불린 것을 그들이 봄으로서 그들의 급소가 찔림을 당하리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187:2.6

    많은 유대인 영도자들은 빌라도가 이러한 기록을 예수의 십자가 위에 붙여서 자기들을 얼마나 조롱하려고 하는지를 알고서, 서둘러 골고다로 달려갔지만,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에 감히 그것을 없애려고 하지 못하였다. 명패를 제거하지 못하게 되자, 아무도 그 기록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 영도자들은 군중들 속에 섞여서 비웃고 조소하도록 힘을 다하여 선동하였다.
    187:2.7

    사도 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룻 그리고 유다와 함께, 예수가 십자가 위의 그의 자리로 끌어올려진 직후, 그리고 그 지휘관이 명패를 주(主)의 머리 위에 못박고 있을 바로 그 때, 현장에 도착하였다. 요한은 예수의 어머니를 현장에 모시고 온 후 얼마 안 되어서, 바로 자기 어머니와 그녀의 친구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계속 그곳에 있지 못하였지만, 열 한 명의 사도들 중에서 십자가형을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187:2.8

    예수는 요한과 그의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있는 그의 어머니를 보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으나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한편, 주(主)의 십자가형에 선임되었던 네 명의 군인들은, 관례대로, 그의 옷들을 서로 나누었다, 한 사람은 신발을, 한 사람은 머리 두건을, 한 사람은 허리띠를, 그리고 네 번째 사람은 외투를 가졌다. 이제 네 조각으로 잘라야 될 웃옷, 혹은 무릎 근처까지 닿는 이음매가 없는 제복, 이 남았다, 그러나 군인들은 그것이 흔히 볼 수 있는 옷이 아닌 것을 보자, 그들은 그것을 위하여 제비뽑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예수는 그들이 그의 옷들을 나누고 있는 동안 그들을 내려다보았으며, 그리고 생각 없는 군중은 그를 조롱했다.
    187:2.9

    로마 군인들이 주(主)의 옷을 갖는 것은 잘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이 의복들을 가졌다면, 유물을 미신적으로 경배하는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주(主)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이 땅에서의 자신의 일생과 관계되는 어떤 물질도 소유하지 못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에 헌납되어지는 높은 영적 이상에 바쳐진 인간 일생에 대한 기억만을 인류에게 남겨두고자 하였다.

    ◄ 187:1

    187:3 ►

    부활
    1. 모론시아 전환
    189:1.1

    일요일 아침 2시 45분에, 파라다이스의 미(未)-정체성확인된 일곱 개인성들로 구성된 파라다이스 육신화 위원회가 그 현장에 도착하였고 즉시 무덤 주위에 배치되었다. 3시 10분 전, 물질적인 것과 모론시아의 복합된 활동들의 심한 진동이 요셉의 새 무덤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서기 30년 4월 9일인, 이 일요일 아침 3시 2분에, 나사렛 예수의 부활된 모론시아 형체와 개인성이 그 무덤으로부터 밖으로 나왔다.
    189:1.2

    매장된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가 나오신 후에도, 그가 이 땅에서 약 36년 동안 그 속에서 사시고 지상에서 활동하였던 육신은 금요일 오후에 요셉과 그의 연관-동료들에 의해 영면하도록 눕혀졌을 때와 똑같이, 훼손됨이 없이 세마포에 싸여 묘실에 아직 뉘여 있었다. 또한 무덤 입구를 막은 바위도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빌라도의 봉인도 여전히 깨지지 않았다: 군인들도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성전 경비병들은 계속 임무수행을 하고 있었다; 로마 경비병은 자정 무렵에 교체되었다. 이들 감시자들의 누구도 그들의 감시 대상이 새롭고 더 높은 실존의 형태로 소생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몸체는 이제 해방되고 부활된 예수의 모론시아 개인성과 더 이상 아무런 상관이 없는 버려진 바깥 껍질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였다.
    189:1.3

    인류는, 개인적인 것, 사물은 모든 것에서 모론시아의 뼈대이며, 그리고 그 둘은 영속하는 영 실체의 반영된 그림자라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한다. 너희가 시간을 영원의 움직이는 모습으로, 그리고 공간을 파라다이스 실체의 순식간에 지나가는 그림자로 간주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하는가?
    189:1.4

    우리가 판단하는 바로는, 이 우주에 있는 어떤 창조체도, 그리고 다른 우주에 있는 어떤 개인성도 나사렛 예수의 모론시아 부활에 연관해서 그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다. 금요일에 그는 이 세상의 필사자로서의 생명을 버리셨다; 일요일 아침에 그는 놀라시아덱에 있는 사타니아 체계의 모론시아 존재로 그것을 다시 취하였다.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하는 그 시간 무렵에 우리가 진술한 대로 그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또한 예수의 필사자 물질적 유해는 수의에 싸인 채로 눕혀져 있는 요셉의 새로운 무덤 바로 그곳에서 발생한, 이러한 필사자 전환이나 모론시아 부활과 연관되어 모두에게 알려진 현상을 우리는 역시 기록할 수 있다.
    189:1.5

    이 모론시아의 깨움에 지역우주의 어떤 창조체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파라다이스의 일곱 개인성들이 무덤을 둘러싼 것을 알지만, 주(主)의 깨움에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무덤 바로 위로 예수가 가브리엘 옆에 나타나자마자, 파라다이스로부터 온 일곱 개인성들은 즉시 유버사로 떠나겠다는 그들의 의사를 신호했다.
    189:1.6

    다음과 같이 기술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개념을 언제까지나 정립해 두기로 하자:
    189:1.7

    1. 그의 물질적인 혹은 육체적인 몸은 부활된 개인성의 일부분이 아니었다. 예수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 그의 유체는 묘실 안에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는 무덤 앞에 있는 돌을 움직이자 않고 그리고 빌라도의 봉인을 훼손하지 않고, 매장된 무덤에서 나왔다.
    189:1.8

    2. 그는 영(靈)이나 네바돈의 미가엘로서 무덤에서 나오신 것이 아니었다; 유란시아에 필사 육신과 같이 육신화하기 전의 그분이었던 창조자 주권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았다.
    189:1.9

    3. 그는, 부활된 모론시아 상승 존재들로서, 사타니아의 이 지역 체계의 첫 번째 맨션세계의 부활실에서 나오는 모론시아 개인성들과 거의 똑같이, 요셉의 무덤에서 나왔다. 그리고 1번 맨션계 부활실들의 넓은 뜰 가운데에 있는 미가엘 기념관의 현존이 우리들에게 유란시아에서의 주(主)의 부활이 맨션세계들 체제의 첫 번째인 이곳에서 어떤 방법으로 촉진되었다는 것을 유츄하도록 이끈다.
    189:1.10

    무덤에서 일어나신 예수의 첫 번째 활동은 가브리엘을 맞이하고는 그에게 임마누엘의 지도에 따라 우주의 관련사들을 집행하는 임무를 계속하도록 지도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임마누엘에게 형제로서의 인사를 전하라고 멜기세덱들의 우두머리에게 지도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의 필사자 전환에 대하여 옛적으로 늘 계신이의 확인이 있었는지를 에덴시아의 지고자에게 질문하였다; 그리고 그들 계층의 창조체로서 그들의 창조자를 환영하고 영접하기 위하여 이곳에 함께 모인, 일곱 맨션세계들로부터 모여든 모론시아 무리들에게로 돌아서신 후, 예수는 필사자-이후 생애의 첫 번째 말씀을 시작하였다. 모론시아 예수가 말씀한 내용은 이렇다: “육신으로의 내 일생을 완결하였으므로, 나는 상승하는 나의 창조체들의 일생을 좀 더 자세히 알고 파라다이스에 계시는 내 아버지의 뜻을 좀 더 계시할 수 있도록, 과도기 형태를 가지고 이곳에 잠시 동안 머물고자 한다.”
    189:1.11

    예수는 말씀을 마친 후에, 개인성구현된 조절자에게 신호를 보내셨으며, 부활을 지켜보기 위하여 유란시아에 모였던 모든 우주의 지능존재들은 그들 각자의 우주 임지로 즉시 떠났다.
    189:1.12

    예수는 이제 그가 유란시아에 잠시 동안 살려고 선택했었던 일생에서의 요청들에 대하여, 창조체로서, 내보여지게 될, 모론시아 차원의 접촉을 시작하였다. 모론시아 세계로 들어가는 이 처음 의례는 지구 시간으로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고,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나와서는 그의 부활에 대한 증거라고 여길만한 것을 발견하려고 빈 무덤 안을 기이하게 여기며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예전 연관-동료들과 교통하려는 그의 욕망 때문에 두 번 중단되었다.
    189:1.13

    이윽고 예수의 필사자 전환─사람의 아들의 모론시아 부활─이 완료되었다. 물질과 영 사이의 중간 개인성으로서 주(主)의 잠시 동안의 체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주(主)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통하여 이 모든 것들을 하였다; 어떤 개인성도 그를 돕지 않았다. 그는 이제 모론시아의 예수로서 사시게 되었고, 이러한 모론시아 생활을 시작할 때 그의 물질적 유체는 훼손됨이 없이 무덤 안에 눕혀져 있었다. 군인들은 여전히 지키고 있었고, 바위에 붙어 있는 총독의 봉인은 아직 파괴되지 않았다.

    ◄ 189:0

    189:2 ►

전체 127
번호 썸네일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27
New 20240721 주일설교ㅣ "기도 훈련"(렘 11:14) ㅣ김현수 목사ㅣ숭실교회
숭실교회 | 10:48 | 추천 0 | 조회 6
숭실교회 10:48 0 6
126
20240714 주일설교ㅣ "경건 훈련"(시 34:11-14) ㅣ김현수 목사ㅣ숭실교회
숭실교회 | 2024.07.21 | 추천 0 | 조회 28
숭실교회 2024.07.21 0 28
125
20240707 주일설교ㅣ "말씀 훈련"(시 1:1-2) ㅣ김현수 목사ㅣ숭실교회
숭실교회 | 2024.07.13 | 추천 0 | 조회 41
숭실교회 2024.07.13 0 41
124
20240630 주일설교ㅣ "마라나타"(고전 16:22) ㅣ김현수 목사ㅣ숭실교회
숭실교회 | 2024.07.07 | 추천 0 | 조회 64
숭실교회 2024.07.07 0 64
123
20240623 주일설교ㅣ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롬 9:1-3) ㅣ김현수 목사ㅣ숭실교회
숭실교회 | 2024.07.07 | 추천 0 | 조회 55
숭실교회 2024.07.07 0 55
122
20240609 주일설교ㅣ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시 84:1-2) ㅣ김현수 목사ㅣ숭실교회
숭실교회 | 2024.06.15 | 추천 0 | 조회 102
숭실교회 2024.06.15 0 102
121
20240602 주일설교ㅣ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 10:51-52) ㅣ김현수 목사ㅣ숭실교회
숭실교회 | 2024.06.09 | 추천 0 | 조회 89
숭실교회 2024.06.09 0 89
120
20240526 주일설교ㅣ "영적 가족이 기적"(엡 2:19) ㅣ김현수 목사ㅣ숭실교회
숭실교회 | 2024.06.02 | 추천 0 | 조회 117
숭실교회 2024.06.02 0 117
119
20240519 주일설교ㅣ "오순절은 소통의 기적"(행 2:1-4) ㅣ김현수 목사ㅣ숭실교회
숭실교회 | 2024.06.02 | 추천 0 | 조회 96
숭실교회 2024.06.02 0 96
118
20240512 주일설교ㅣ "신앙유산이 기적"(출 3:15) ㅣ김현수 목사ㅣ숭실교회
숭실교회 | 2024.05.19 | 추천 0 | 조회 127
숭실교회 2024.05.19 0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