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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1 - 수요기도회 설교문(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_시편 10:12-18)

작성자
숭실교회
작성일
2020-04-01 11:46
조회
4669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본문말씀: 시편 10:12-18

시편 10편은 시편 9편과 연속시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시에서는 운율을 맞추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시편 9편에서 10편까지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째, 시편 10편에 보면, 누구의 시편인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9편부터 10편까지가 다윗의 한 시편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시편 9편과 10편이 주제적으로도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시편 9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나요?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주로 고백하였습니다. 9편 7절과 8절에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0편도 작자는 미상이지만 다윗이 지은 9편과 같이 하나을 심판주로 선포합니다. 마지막 18절에 보시면,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시편 9편과 10편은 여러 가지로 연속성을 가진 시편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내용상으로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시편 9편은 전체 내용적으로 볼 때에 감사시이자 찬송시입니다. 반면에 시편 10편은 탄원시이자 간절한 기도시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시편 9편에서 다윗은 공의와 정의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시편 10편에서 시인은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구원해주실 것을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문에서는 시편 10편을 통해 3가지를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인간이 행하는 모든 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입니다. 조금 전에 적었듯이, 시편 10편은 고통의 경험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이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부르짖는 간절한 탄식이자 기도입니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탄원하고 기도하는 이유는 악한 자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지금 시편기자가 바라보는 세상 현실은 악한 자가 가련하고 연약한 자를 심히 압박하고 있습니다. 7절로 10절에 보시면, 악한 자가 어떻게 가련하고 약한 한 사람을 압박하여 고통스럽게 하는지 드러납니다. 7절에 보면, 악인은 온갖 악한 말로 가련한 사람을 핍박합니다. 8절로 10절에 보면 악인은 은밀하게 숨어서 가련한 자를 죽이며 온갖 포악한 행동으로 가련한 자를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악인은 전혀 양심의 가책도 없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오히려 5절과 6절에 보면 “자신들의 입지가 견고하여 누구도 자신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가 어떻게 이토록 악한 일들을 서슴없이 행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11절에도 “악인이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악인이 악한 행동을 하는 모든 근원이 어디에 있나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므로 자신이 아무리 악한 행동을 할지라도 돌아보는 존재도 없고, 심판하는 존재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악인의 근본적인 어리석음이 바로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악을 저지르고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하나님 없는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두려움 없이 악을 행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오늘날도 보십시오. 얼마나 악한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두려움 없이 악을 행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보면, 악한 자들의 악행이 반드시 드러나고 맙니다. 요즘도 세상을 보십시오. N번방의 사건과 같이 절대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행하는 숱한 악한 일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숱하게 악한 일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냐면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악인의 악행을 그냥 넘기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악인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그 악인의 길은 결국 멸망의 길이 될 것입니다. 이 두려움을 가지고 저와 여러분은 결코 악한 길로 가지 않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부재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악인의 악한 행실보다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0편 1절입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어찌하여”라는 부사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그만큼 시편 기자는 “어찌하여?”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라는 탄식의 말입니다. 하나님! 악인의 악함 때문에, 세상이 이토록 고통 받고 있습니다. 악인의 압제로 인하여서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자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도대체 왜? 이 고통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멀리 숨어 계시는 겁니까? 그렇게 탄식하는 겁니다. 세상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하나님은 숨어서 아무런 응답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너무도 답답해서 12절에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일어나옵소서!” 이 기도는요. 멀리 숨어계시지 마시고, 이제는 일어나서 세상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십시오. 제발 이 힘겨움으로부터 구원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이러한 시편기자의 탄식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믿는 자들을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침묵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래! 운이 없으니까, 속된 말로 재수가 없으니까 내가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름대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합리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아니,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하나님이 내게 관심이 없으신 거 아닌가? 선하신 하나님이 왜 세상의 악한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이 믿는 우리들을 정말로 힘들게 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여러 차례 간증했듯이, 저는 인생의 가장 힘겨운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짧지만 강력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게 제게 영적으로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종종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말씀해주시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코로나 19가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교회에 만들어 놓은 고통의 현실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속히 허락해 주십시오. 하루 속히 자유롭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그리워하고 있는 예배당에 나와서 함께 예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응답이 없으시고, 침묵하십니다. 오히려 개학이 무기한 연기 되어서 도대체 이 괴로운 시간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습니다. 이럴 때면 “하나님이 왜 이러시지? 내 기도가 부족한가?” 이런 생각이 들고, 너무도 괴롭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에 제가 종종 묵상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엘리위젤이라는 유명한 유태인 작가가 있습니다. 독일군이 유태인 600만 명을 학살하였는데, 그때 엘리위젤도 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기다리다가 극적으로 살아남게 되었고, “흑야”라는 책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탔습니다. 이 책에서 엘리위젤은 자신이 독일군 감옥에서 경험한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유대인 노벨상 수상 작가인 엘리 위젤이 나치 수용소에서 한 10대 유대인 소년이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와 공개 처형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 10대 소년이 교수대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엘리 위젤은 소리 없이 터져 나오는 피묻은 절규를 허공에 던집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자신의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나지막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나는 저 소년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엘리 위젤은 이 신비로운 음성을 향해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고 묻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소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합니다. 엘리 위젤은 그 소리를 물음 부호로 자신 안에 파묻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잔혹한 홀로코스트에서 행운의 생존자가 된 그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유명한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을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에서 그는 수용소에서 있었던 그 신비한 음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뜻밖에 그리스도인이었던 모리악은 그 음성의 주인공이 당신과 같은 유대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모리악은 그 음성의 주인공은 임마누엘(우리와 같이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그 소년처럼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으냐면요?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로부터 멀리 숨어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그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함께 힘들어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과 같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의 침묵이 느껴지는 때에도, 이 믿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시편 10편의 기자가 바로 이러한 믿음을 우리에게 고백하여 줍니다. 시편 기자는 악인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숨어계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편 기자는 강한 확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 확신이 어떻게 시작되냐면요? 1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원어적 의미를 그대로 살려 번역하면 “주께서는 확실히 보셨습니다!” 이게 시편 기자가 선언하는 믿음의 핵심입니다. 악한 자가 뭐라고 말하나요? 4절에 “하나님은 자신의 악한 행동을 감찰하지 않으신다.” 11절에 “하나님은 자신의 악한 행실을 보지 않으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악한 일을 행하고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보시는 분입니다. 아니 이미 “악한 자의 악한 행실을 확실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행을 갚으려고, 그러니까 심판하시려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악인들로부터 고통을 당한 고아와 같이 가련한 자, 힘든 자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인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가련한 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8절의 고백으로 10편을 마무리합니다.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악한 자의 편이 되지 않으십니다. 결코 악한 자를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자, 겸손한 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겸손한 자를 고통으로부터 건져주십니다. 조금 전에 엘리위젤의 이야기를 들려드렸는데요. 말씀을 준비하다가, 온라인에서 조금 전에 전해드린 말씀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게 되었는데요. 독일 사람들이 유태인 600 만 명을 학살하는 현장에서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그렇게 질문하였을 때, “하나님은 바로 저 현장에 계신다.”라는 대답을 얻었잖아요. 그런데 유태인을 학살할 때에 이 일에 앞장 선 사람이 바로 히틀러의 오른팔 중에 하나였던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2차 대전이 끝나고 도망을 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고 15년이 지난 후에 이 사람이 체포되었습니다. 독일이 아니라 아르헨티나로 도망가서 수염도 기르고 머리 모양도 바꾸고 이름도 바꾸고 살아서 아무도 그를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스라엘의 첩보기관에 의해서 신분이 드러나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961년 12월에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엘리위젤은 이 장면을 보고서 동일하게 “지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라고 물었습니다. 엘리위젤 자신의 대답은 “하나님은 지금 저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서 아이히만을 심판하고 계신다.” 그것이었습니다. 엘리위젤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 두 눈 부릅뜨시고 세상의 현실을 보고 감찰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 악한 자는 결코 인정하지 않으시고 연약한 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 그래서 악한 자는 심판하시고, 겸손한 자는 그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시리라 확신합니다. 이 하나님의 손 붙잡고, 이 힘겨운 세상을 이겨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1.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2. 우리 교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현실에서 우리 성도님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옵소서!
3.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과 치료제가 속히 개발될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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