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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며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2020.08.19 - 수요일 저녁예배 설교문

작성자
숭실교회
작성일
2020-08-19 14:59
조회
1798
신앙인의 자존심(행 26:24-29)

자존심을 국어 사전에서는 ‘제 몸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 가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좋은 이미지를 주기도하고 나쁜 이미지를 주기도 합니다. 이시간에는 좋은 이미지의 자존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나라의 탁월한 문학자 중의 한 분인 이은상 씨는 자존심에 대해서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자존심이란 결코 배타가 아니다. 또한 교만도 아니다. 다만 자기 확립이다. 자기 강조다. 자존심이 없는 곳에 비로서 얄미운 아첨이 있다. 더러운 굴복이 있다. 넋빠진 우상이 있다. 위대한 개인, 위대한 민족이 필경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이 자존심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자존심의 개념도 이와 비슷하리라고 봅니다. 세상을 향해 아첨하거나 비굴해지지 않기 위해서 이 자존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서는 왕자처럼 처신하면서 세상에 나가면 걸인처럼 행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어느 성경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바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장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성경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매우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왕과 총독, 그리고 많은 고관들 앞에서 쇠사슬에 매여있지만 당당하게 말하는 바울의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너이다 하니라”

이 말은 아그립바 왕에게 전하는 바울의 신앙의 자존심 즉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엄청난 신앙고백의 말입니다.

바울은 특별한 혐의 사실도 없이 2년이 넘도록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총독의 형무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울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려고 백방으로 애쓰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행정정을 담당하는 총독 베스도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을 석방하자니 유대인의 감정을 건드릴 것 같고, 그대로 가두어 두자니 별다른 혐의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직시한 바울은 자신이 무혐의 처리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로마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받는 것뿐이라고 판단하여 로마의 최고 법정에 상소를 합니다.
일이 이렇게 전개되자, 죄인를 황제 앞으로 보내려면 뚜렷한 죄목이 첨부되어야 했던 당시 관례로 보아 바울은 총독에게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존재였을것입니다. 이렇게 미묘한 정치적 사건으로 고심하던 그때, 총독은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의 통치자로 있던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동생의 내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스도총독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과 함께 최종 결정을 내릴 작정으로 다시 공판을 열게 되었고 본문이 바로 그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먼저 아그립바 왕을 향해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만났으며, 무엇 때문에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문을 엽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드디어 그가 증거하고자 했던 핵심,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백성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러자 총독 베스도는 참지 못하고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리어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25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시선을 왕에게로 돌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고 마음먹은 대상은 총독보다도 왕이었습니다. 총독에게는 지난번 재판에서 이미 할 이야기를 다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왕과 그의 누이동생 버니게를 향하여 복음증거를 계속합니다.

26-27절을 통해 보여주듯이 왕의 마음과 생각을 다 알고 나 있는것처럼 부드럽게 복음의 핵심을 하나씩 말하고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변하면서 복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왕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그 당시에 사용되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에는 형편없는 것이라고 얕잡아 보는 멸시의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곧 “네가 몇 마디의 웅변으로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비아냥대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정도의 왕의 말이라면 그만 입을 다물고 물러났을것입니다. 포기했을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외에는 나와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9절)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말입니까?
여기에서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한마디는 사도 바울의 자존심을 통쾌하게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왕이여 당신은 나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의 승자는 당신이 아닌 바로입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있고, 또 “예수 없는 왕자보다도 예수 있는 죄수가 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나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으십시오”라는 메시지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당신에게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의 뜻도 그 속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한번 상상해보세요.
한사람은 왕이고, 또 한사람은 죄수입니다. 화려한 자주색 왕복을 걸친 자와 쇠고랑을 차고 냄새나는 죄수복을 입은 자가 지금 대면하고 있습니다. 왕의 곁에는 그의 누이동생인 버니게가 번쩍거리는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앉아 동정과 경멸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바울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진홍색 정장을 차려 입은 총독과 행정장관들, 그리고 로마 군대의 기라성 같은 장교들이 둘러 앉아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가장 화려한 신분에 속하는 그들은 권세와 부를 소유하고, 인생을 즐기며 사는 자들입니다

더욱이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20대 중반을 넘기지 않은 새파란 젊은이들이고, 바울은 이미 50대를 바라보는 장년입니다. 그들에 비해 너무 초라해 보이는 처지인지라 바울의 기가 꺽인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연약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 떳떳하고 의연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대단한 자존심을 가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동기가 있길래 이렇게 신앙의 자존심이 강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했다는 즉 만났다는 중요한 사건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게 되자마자 그는 밑바닥부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가치관의 변화요. 패러다임의 변화였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 사람을 보는 눈, 부귀 영화를 보는 눈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를 발견한 다음부터 그는 누구를 보아도 ‘당신도 나와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신앙의 자존심을 가지고서 왕자처럼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바울과 같은 신앙의 자존심을 가져야 할까요?

첫째, 세상이 갖지 못한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돈을 다 쏟아 부어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이미 세상에서 누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먹고 마시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왕과 견줄만한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에 비해 바울은 떡 한 조각으로 겨우 연명하는 죄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마음의 평강과 세상 사람이 모르는 희락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7세에 왕이 된 아그립바는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평생 눈에 불을 켜고 안절부절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권좌를 넘보는 듯한 사람이 있으면 중상모략을 해서 그를 제거해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자유함이 있을까요? 무슨 기쁨이 있을까요?
버니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왕의 누이 동생이었지만 이미 몇 차례의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와 오빠에게 얹혀사는 처지였습니다. 그 마음에 평안이 있었을까요? 왕비의 옷을 걸치고 진수청찬을 먹는다고 그 마음에 진정한 삶의 기쁨이 있었을까요? 더욱이 당시 세간에는 오빠인 아그립바 왕과의 사이가 수상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여자에게 자유함이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는 믿지 않고 겉만 요란하게 꾸미는 사람들을 볼 때 자기에게 있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들이 그들에게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긍지입니다.

송명희시인
의사의 부주의로 아기의 뇌를 집게로 잘못 건들어 소뇌를 다쳤습니다. 태어난 아기는 울지도 못하고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여물지 못한 계란처럼 아기 머리가 만지는 대로 푹푹 들어가 만질 수도 없었습니다. 열 살이 넘어가면서 하나님과 어머니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자살하려고 했으며, 무조건 반항이었고 무조건 원망이었습니다. 미치고 싶었으나 미쳐지질 않는 게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6살 되던 해 극심한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중에 자신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 가진재물 없으나, 나 가진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있는 건강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송명희 시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참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그립바왕과 버니게에게 자유함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세상이 갖지 못한 은혜, 기쁨,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나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시간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고백도 주님 때문에 신앙의 자존심을 가지고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영원히 누릴 영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11:25-27절을 보면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실 때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영생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즉 왕이 되어 한평생을 희희낙락하면서 살았다 할지라도 영원히 사는 생명을 잃어버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반문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이 영생만은 반드시 소유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성도여러분!
한번 태어난 목숨은 언제고 예외없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끝이 좋으려면 영원히 누릴 영광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끝을 좌우하는 권세를 가진 예수를 우리 안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영생을 소유한 자는 끝을 바로 잡은 사람입니다. 인생의 성패는 이 땅에서 얼마나 오래사느냐, 얼마나 풍요롭게 살았느냐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사느냐 아니면 지옥에서 영원히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볼 때 아그립바 왕은 끝을 잘못 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왕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같은 처지였습니다. 세상에서 잠시 죄수로 살다 내세에서 영원히 왕자로 사는 것은 세상에서 잠시 왕으로 살다 내세에서 영원히 죄수로 사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이었기에 바울은 자신의 결박당한 것 외에는 그들 모두가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내세를 소유한 자들이기에 더욱 신앙의 자존심에 흔들림없기를 바랍니다.

결론:
세상부귀보다 하늘의 영광을 기뻐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를 누리며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잘 하여서 천국에서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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