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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6 - 주일오후찬양예배
Author
숭실교회
Date
2020-09-06 12:41
Views
1888
어찌하여! (2020. 9. 6. 주일오후 찬양예배)
본문말씀: 시편 42편 1절~5절
며칠 전에 한 성도님께서 짧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목사님! 요즘 힘이 드시지요? 기운내세요.” 그 문자를 확인하면서, 순간 마음이 울컥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 비대면예배를 시작하면서, 담임목사로서 마음이 참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밤에 수없이 잠을 깨고는 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때에는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듯이, 남몰래 어두운 본당에 들어가 하나님께 답답한 마음을 쏟아놓고는 했었습니다. 그럴 때면 성도 여러분과 함께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가 더 크게 느껴졌고, 그 괴로움이 느껴질수록 올해 초까지도 마음껏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교제했던 일들이 한없이 그리워지고는 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시편 42편의 말씀을 읽을 때에 지금 42편의 말씀을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시편 42편의 시인도 저와 여러분과 같이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마음껏 예배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괴로운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42편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이 안타까움을 함께 느끼기를 원하고,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속히 온전한 예배를 회복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의 내용을 함께 나누기 전에, 말씀의 이해를 위해서 먼저 구조적으로 주목해야 할 점을 두 가지 적어드립니다. 첫째는 시편 42편과 43편의 말씀이 구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동일한 후렴구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42편 5절과 11절, 그리고 43편 5절에 보시면 동일하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는 후렴구가 반복됩니다. 그래서 둘째로, 학자들은 이러한 구조적인 이유 때문에 시편 42편과 43편은 본래 하나의 시편이었는데, 편집자가 시편을 편집하면서 둘로 나누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볼 때에 42편 1절에서 5절, 6절에서 11절, 그리고 43편 1절에서 5절까지, 이렇게 세 단락으로 구분하여 말씀을 연구하고 이해합니다. (세심하게 읽어보면 이 단락의 중심 내용에 따라서 세 차례 반복되는 후렴구의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구분에 따라서 시편 42편의 말씀을 한 단락씩, 세 차례에 걸쳐서 함께 나누며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순서에 따라서 42편 1절에서 5절의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보시면, 지금 시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이 시편을 노래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지금 시인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을 뵙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슴이 찾는 시냇물은 광야의 깊은 계곡에 생수처럼 흘렀던 것인데, 지금은 가뭄이 오래 되어서 완전히 말라버린 그런 시냇물입니다. 그러니까 시냇물을 찾고 있는 사슴은 지금 오랜 동안 계속된 갈증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는 목마름으로 인한 고통의 몸짓으로 간절히 시냇물을 찾고 있는 겁니다. 그와 동일한 타는 목마름과 고통의 몸짓으로 시인은 하나님을 뵙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라고 말씀하잖아요? 여기서 “나아간다.”는 단어는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갈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인은 타는 영혼의 목마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서, 그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뵙고 마음껏 예배하고 기도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렇게도 간절하게 시인이 하나님을 뵙고 싶어 하는 까닭은 지금 하나님의 도움이 너무도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후렴구에 “그나 나타나 도우심으로”라고 말씀하듯이, 시인은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이 긴급하게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너무도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인의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드는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원수들의 조롱입니다. 3절을 보시면, “사람들이 종일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탄식합니다. 그렇게 가고 싶은 성전에 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뵐 수 없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 주변의 원수들이 시인을 향하여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조롱합니다. 이 말은 불신자들이 시인이 너무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데 네가 찾고 있는 하나님이 너를 돕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까 너의 하나님은 없는 거야. 너를 도우실 하나님은 없는 거야.” 그렇게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수들이 시인의 괴로운 상황을 이용하여서, 하나님의 향한 시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넘어뜨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시인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종종 이런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음성을 종종 듣습니다. “너희가 그토록 목숨을 걸고 예배하는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그 하나님이 있다면, 너희가 예배하고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코로나 19를 속히 물리쳐 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니 너희가 찾는 하나님은 없다.” 이 세상의 조롱소리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어느 때까지입니까?”라고 탄식하게 됩니다. 지금 시편 42편의 시인이 바로 이러한 상황입니다. 주변의 원수들, 무신론자들이 시인이 처한 괴로운 상황 가운데서 시인이 그토록 간절히 뵙기를 원하는 하나님까지도 무시하고 조롱하면서 “너를 도우실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시인의 괴로움을 가중시키는 것은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시인이 “전에” 한 일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순례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때에 시인은 그 순례자들과 더불어서 기쁨과 감사의 찬양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심지어 시인은 가장 앞에 서서 순례자들의 행진을 인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지만, 그렇게 행복했던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답답함을 느낄수록 시인의 마음에는 과거에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던 그 행복한 때가 더 그리워집니다. 그 그리움과 기억이 커질수록 시인의 마음은 “상하는도다. 그러니까 가슴이 미어진다. 북받쳐 오른다.”고 고백합니다. 가장 행복을 주었던 일이자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인데, 하지 못하니까 가슴이 미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휴가 때에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님 댁을 방문했었습니다. 건강이 점점 더 나빠지시는 아버님께 두 아들을 데리고 꼭 인사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손주들을 보시고 아버님이 참 좋아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갑자기 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가족 모두가 당황했습니다. 제가 아버님을 모시고 “좋으신데 왜 우시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랑하는 손주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야속해서” 우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힘이 있으시고 일을 하실 때에는 사랑하는 손주들에게 자신이 해주고 싶으신 것을 마음껏 해주실 수 있었고 그것이 큰 행복이었는데, 이제는 약해지셔서 아무 것도 해주실 수 없으니까 그런 마음이 드신 것입니다. 지금 시편 42편의 시인이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하면 너무도 행복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껏 나아가서 찬양하고 예배한 기억이 있습니다. 성전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도의 응답을 수없이 받은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간절히 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전의 행복을 기억하면 할수록 가슴이 미어지고 답답한 것입니다. “다시 행복했던 예전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에 마음껏 들어가 하나님을 뵙고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런 불안한 마음이 끊임없이 시인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자. 성도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시인이 외치는 소리가 5절의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세 차례의 동일한 후렴구는 시인이 시인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입니다. 우선 5절을 보시면, 시인의 복잡한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데요. (1)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꾸짖습니다. “어찌하여 낙심하고 불안해 하고 있는 거야?” 시인은 지금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온갖 불안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다시 갈 수 있을까? 하나님께 다시 예배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믿음이 없는 자가 가지는 생각 같아서 “야. 도대체 왜 이렇게 불안해 하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 책망하는 겁니다. (2) 시인은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자신에게 명령합니다. “야. 불안해 하지마!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야. 그러니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가져.” 그렇게 스스로에게 명령하면서 위로하는 것입니다. (3) 더 나아가 시인은 “하나님께서 나타나 도우심으로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는 상황과 같이 답답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도우실 거야.”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찬송하리로다.”고 고백하는데, 이 말은 시인의 의지와 하나님을 향한 서원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 나는 하나님을 찬송할 거야. 하나님! 하나님께 찬송하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42편이 놓인 상황이 지금 저와 여러분이 놓인 상황과 너무도 유사한 것 같지 않나요? 저와 여러분도 시인과 같이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서 마음껏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어서 답답함과 불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오늘 함께 나눈 42편 1절로 5절에서 시인이 주는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시인이 보여주듯이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원해도 하나님의 성전에 마음껏 나와서 예배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19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마음껏 예배당에 나오지를 못합니다. 대면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개인마다 상황의 차이가 있어서 여전히 성전에 나와 대면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시간이 길어지니까 죄송한 마음 때문에, 심지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처럼 생각이 되어서 더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의 모습을 보시면, 믿음의 선배들도 마음껏 하나님의 교회에 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현재 상황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현 상황 속에서 예배의 현장에 나오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정죄하거나 누군가를 정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어느 자리에서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충실히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럼에도 우리는 온전한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는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합니다.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고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처소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한 가지 너무도 중요한 예배의 요소가 빠져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교제의 일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 온전한 예배의 회복은 성전에서 드리는 일에 있음을 아시고, 이 일을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성전의 자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시인이 그렇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일이 성도님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나아가면서 기쁨과 감사로 찬양한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식사의 교제를 나누었던 이 성전에서의 일들을 사모하고 그리워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여러분도 이 곤곤한 상황에서 아마 42편의 시인과 같이 복잡한 심경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불안하기도 할 것입니다. 염려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탄식이 나오기도 할 것입니다. “정말 회복될 수 있을까?” 의혹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연약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과 같이 “나는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 그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 하나님을 찬송할 거야.” 이런 믿음으로 이 어려운 시대를 이겨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 주여! 속히 예배의 자리를 회복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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